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고슴도치 딜레마(Porcupine’s dilemma)
“저는 친구 사귀기를 피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 때문에 상처받기 싫을 뿐이지요.”
언제부터인가 청소년이나 성년기 초반의 젊은이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고백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아무에게도 다가서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넌 네게 상처 주지 않을 자신 있는 거야?’
‘고슴도치 딜레마(Porcupine’s dilemma)’란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마지막 저작인 《부록과 추가(Parerga und Paralipomena)》에 실려 있는 우화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서로의 가시에 얼마간 찔리게 마련이라 일정 간격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는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따뜻함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비관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여성을 비하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한편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이 되어가는 현대에 와서, 고슴도치 딜레마는 쇼펜하우어가 쓴 의미와는 달리 아무리 타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너 나 가리지 않고 어울려 놀던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중고등학교 때만 되더라도 친구관계로 상처받는 일이 잦아집니다. 단짝으로 지내던 아이에게 차디찬 냉소를 받게 된다던가, 가슴 깊은 비밀을 그에게만 내보였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모든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일들이 불가피하게 일어납니다. 친구를 믿었던 만큼, 사랑했던 만큼, 이러한 상처들은 골이 깊습니다. 순진함과 영악함, 다정함과 잔인함이 혼란스레 뒤섞인 청소년들은 그에 걸맞게 친구관계도 지뢰밭과 같습니다. 한순간의 행복의 꿈이 배신의 칼날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이 나이 또래의 많은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낙관적이라는 점입니다. 성인들 같으면 평생 용서하지 않을 사건 후에도 어느새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어울리기도 하고, 또 인간관계의 실망에서 금방 벗어나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러지 못하는 적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이들은 몇 번 상처를 입고 나면 다시는 먼저 남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타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려다가 가시에 찔린 경험을 내내 반추하면서 겁에 잔뜩 질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만큼 타인의 따스한 온기를 갈망하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어느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을 고립에서 꺼내주기만 바라지요.
그러나 요즘 세상에, 가시를 품은 채 움츠러든 아이에게 자신의 가슴을 벌려 보이는 친구는 참 드뭅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고슴도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이들의 주된 정서가 되어버립니다.
반면 고슴도치의 가시라는 표현이 언제나 이처럼 심각한 상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깊게 사귀게 되면 요구받는 것도 많아지고 거치적거리고 깔끔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이 많은 요즘, 고슴도치의 가시는 오히려 쿨한 관계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요새는 ‘어장을 관리한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성 친구 한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영원히 유보한 채 여러 명의 이성 친구에게 다가설 듯 말 듯하면서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얽매일까 봐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런 현상도 일종의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상의 친구들, 카카오톡 등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만 교류하는 친구들은 현대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특성인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통한 간접적인 대인관계들입니다. 정작 눈과 눈을 마주치고 손끝으로 짜릿함을 전달하는 인간관계는 드물어지고, 대신 스마트폰에 입력된 디지털 친구들이 무수히 많아지는 현상.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만남 대신, 온갖 축약어로 단순화된 문자 메시지들이 하루에도 수백 통씩 건네지는 현상들은 고슴도치 딜레마에 대한 하이테크식 해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터페이스를 통하는 만큼 가시에 찔릴 위험이 전혀 없고, 내게 상처를 준 친구들은 주저 없이 친구 목록에서 삭제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수히 많은 친구들 속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다는 환상을 이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디지털 기술이 우리에게 선사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상처받는 것을 무릅쓰지 않는 인간관계를 인간관계라 할 수 있을까요? 그를 또는 그녀를 품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딜레마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종국에는 선택을 해야만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택을 영원히 미루면 아무것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외로움으로 인한 절망감과 가시로 인한 상처, 둘 중에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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