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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토닥이

097. 각인(Imprinting) - 첫사랑, 이루어지면 안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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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Imprinting) - 첫사랑, 이루어지면 안되는 사랑

 

5층 맞은편에 참한 그 애가 살았어,
예쁘고 창백한 소녀였지.
나폴리를 떠난 지 스무 해가 되었지만
난 아직도 밤마다 나폴리 꿈을 꿔.
내 아들 녀석이
내가 공부하던 오래된 라틴어 책에서
뭔가를 찾아냈는데, 그게 뭐냐면, 팬지 꽃······.
왜 내 눈에서 눈물이 반짝이지?
누가, 과연 누가, 그 까닭을 알까······.

 

움베르트 에코의 자전적 소설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 인용된 이탈리아 대중가요 가사의 한 부분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중풍 후유증으로 과거 기억을 상실한 60세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되찾기 위해 20세기 전반 이탈리아 대중문화의 흔적들을 이 잡듯이 뒤집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망각 속에 파묻혔던 자신의 절실했던 첫사랑을 낚아 올립니다. 연이은 발견들은 그에게 놀라운 깨달음을 가져옵니다. 자신의 부인은 물론이고 잠깐잠깐 외도를 했던 수많은 여자들이, 사실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연인의 흔적을 일깨워주는 조각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비슷한 이야기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도 등장합니다. 약혼자가 등반 사고로 죽은 후, 남겨진 약혼녀 히로코는 약혼자가 자신을 사랑했었던 것은 단지 약혼자의 잊지 못할 첫사랑과 자신이 쌍둥이처럼 닮았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첫사랑의 대상에게 온전히 돌려주곤, 정작 자신은 죽은 약혼자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가 사랑했던 대상이 온전한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첫사랑은 이렇듯 평생에 걸쳐 기억을 남깁니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에 남는다고들 하지요. 평생에 단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열정적인, 그러나 동시에 가장 서툴렀고, 가장 큰 씁쓸함과 회한을 남기는 사랑입니다.

 

낭만적인 저자들은 이러한 첫사랑이 이후 사랑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들을 즐겨 언급합니다. 첫사랑의 대상을 아득하게나마 상기시키는 사람에게 다시금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반드시 얼굴이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비슷할 수도 있고, 취미나 성격이 비슷할 수도 있으며, 하다못해 특이한 몸동작이나 목소리의 울림이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첫사랑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연인과의 사랑은 강박적이고 무조건적인 성향을 띱니다. 그 때문에 성공보다는 또다시 실패하는 경우가 많으며, 실패한 사랑은 첫사랑에 대한 애절함을 더욱 증폭시키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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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에 대해 심리학은 어떤 설명을 하고 있을까요?

 

사실 진지한 학자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이론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각인현상(imprinting)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이것은 저명한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치고 이미지 검색을 하면, 새끼 오리들이 그의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가는 유명한 사진이 나옵니다. 그는 인공부화기에서 부화시킨 새끼 오리들에게 특정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 오리들에겐 생후 13~16시간) 동안 움직이는 물체를 보여주면, 이후엔 마치 그 물체가 어미인 양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을 발견하고 각인현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로렌츠는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자극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오리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로렌츠를 어미로 알고(정확하게는 로렌츠의 방수장화를 어미로 알고)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각인현상을 로렌츠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말 이미 더글러스 스폴딩(Douglas Spalding)이라는 생물학자에 의해 병아리에서 발견되었고, 생태학자이자 로렌츠의 스승인 오스카 하인로트(Oskar Heinroth)에 의해 연구되기도 했습니다. 각인은 오리를 비롯한 조류에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이후 사람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인간 아기들은 태어난 직후 반복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엄마, 아빠에게 평생 지속하는 각인을 형성합니다. 아이의 질병이나 부모의 사정 등으로 이 기회를 상실한 아이는 이후에 부모와 다시 합쳐도 부모와의 애착관계에 문제가 생기며, 주의력 결핍과 우울증 등 다양한 정서장애를 앓게 될 위험이 커진다고 합니다.

 

엄마에 대한 각인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일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간형 로봇으로 인간 아이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 가정에 입양된 데이비드의 사용설명서에는 각인절차(imprinting protocol)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각인절차를 활성화시키면 로봇은 활성화시킨 사람과 영원한 애착에 빠지게 되니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내용이지요. 데이비드는 각인절차가 활성화되어 입양한 엄마와 애착을 형성하나, 행복했던 시절은 잠시일 뿐 이내 버려집니다. 그러곤 그로부터 2,000년 동안 데이비드는 빙하 속에 갇힌 상태로 이제나 저제나 엄마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립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자 낸시 칼리시(Nancy Kalish)는 나이가 훨씬 든 연후에 첫사랑과 재회하여 다시 사랑을 가꾼 커플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녀는 진짜로 이들에게 각인현상이 작용하고 있는가를 규명하고자 다각적인 설문조사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첫사랑과 재결합한다고 해서 유달리 행복하다는 보장도, 결혼생활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사랑의 불꽃을 되살려내지만 결국 다시 실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답니다. 칼리시는 이에 Lost & Found Lovers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첫사랑에 각인효과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이나 대중가요에서 실제 살아 숨 쉬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예술가들은 첫사랑을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되면 환상이 깨지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도둑맞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황순원 선생이 쓴 소나기에서처럼 첫사랑의 대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가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 이유는 인간 심리는 이상해서 자신이 형성한 이미지에 각인되는 것이지, 실제 외적 대상에 각인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인자를 통해 수십만 년 전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애착 및 사랑의 원형(archetype)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사랑은 바로 이렇게 내재되어 있던 원형의 이미지를 깨우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인간이 평생을 두고 찾아 헤매는 것은 첫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깨어난 자기 내부 속의 원형인 것입니다.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정신분석학자인 카를 융(Carl Jung)은 이러한 원형에 대해 남성에게는 아니마(anima), 여성에게는 아니무스(animus)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에는 몇 가지 형태가 있으며, 삶의 과정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아니마, 아니무스가 깨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형을 깨운 대상과 원형 자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첫사랑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갖게 되지만, 사실 그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한 원형들인 것입니다. 평생을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던 금은보화가 바로 자기 집 앞마당에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주인공은 만리타향에서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넘은 후에야 이를 깨닫고 귀환하게 됩니다.

 

선현들의 깨달음 속에서 나 자신의 무지와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사랑과 다시 마주친다 해도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너를 통해 내 영혼의 일부가 깨어난 것에 대해,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으로 이렇게 성장한 것에 대해, 네게 감사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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